고향을 지키는 소나무 되어

“봉평, 중앙, 정량동 쪽으로는 경로당마다 백회장이 고기를 갖다 준다.”

오랫동안 백현백 회장(67)을 알고 지내온 주길자 여사님의 소개다. 수십 년간 시민의 손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가 함께 봉사해 온 인연으로 백회장의 행적을 훤히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백현백 회장은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그렇게도 못 한다”면서, “고기는 갖다 주고도 욕을 먹을 수 있는 물건이라, 안색이 좋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못 갖다 준다”고 말한다. 정량동 주민자치위원장, 안전모니터 단장, 충렬사 이사, 자원봉사협회 회장 등등 맡았던 일이 수십 가지라 가는 곳마다 부르는 호칭이 다양하지만, 2년째 통영시 15개 읍면동 주민자치협의회의 회장을 맡아오고 있는 터라 최근 그의 호칭은 ‘회장’이다.

통영 사람이 흔히 ‘고기’라고 말하는 것은 생선이다. 통영수협 중매인으로 오랫동안 일한 그에게 생선은 ‘귀한 선물’이면서 마음만 내면 ‘할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고기’는 백현백 회장이 눈물로 밥을 먹던 시절 그에게 희망을 가져다 준 바다의 선물이기도 하다.

“아주 어려운 시절이 있었죠. 20대 때 섭패 공장을 운영했는데, 30대 초쯤 망해 버렸어요. 나전칠기가 어려워지면서, 나전을 깎아 만드는 섭패 공장도 타격을 받은 거지요. 버티다, 버티다 결국 회사가 부도가 나자 사람 관계도 엉망이 되어버리고 가족들도 힘들어졌어요. 오죽하면 딸 둘 데리고 도남동 바다에 가서 ‘줄로 묶어가 같이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을까요.”

사업이 잘되다가 망한 것만큼이나,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고달팠다.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우여곡절들을, 그는 ‘책을 써도 몇 권을 쓸 만큼’ 된다고 말한다.

이런 어려움에서 그를 끌어내 준 것이 바로 바다였다. 천혜의 어장인 통영 바다는 품에 안아 기른 물고기들을 끝도 없이 풀어놓았고, 백 회장은 고기를 받아 5일장이 서는 곳마다 찾아가 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일도 쉽지 않았어요. 이미 바다에서 생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관계와 판로가 형성되어 있었고, 나는 그런 경로를 몰랐으니까요.”

더 나은 가격에 고기를 사기 위해 통영뿐 아니라 여수나 부산의 위판장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발버둥치며 30대를 헤쳐 나올 무렵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누나들이 막내 동생을 끔찍이 돌봐주며 제몫의 일을 하기 시작하자, 끝이 보이지 않던 절망도 더 이상 발꿈치를 물지 못했다.

“지금은 아내랑 막내아들이랑 셋이 같이 일을 합니다. 가족이 같이 하니까 마음도 잘 맞고 봉사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좋습니다.”

수협 중매인 57번 경미상회, 세 가족이 생업으로 일하는 현장이다. 중국 유학까지 다녀온 아들이 같이 일하겠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걱정이 되기도 하고 아깝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든든함이 더 크다. 아들과 아내가 있기에 동네일을 볼 여유도 있는 것이니까.

“처음 봉사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한 건 십대 때였어요. 한번은 동네 우물이 다 말라버릴 만큼 엄청난 가뭄이 왔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공장에 있는 지하수를 사람들에게 무료로 대주었어요. 사람들이 저마다 양동이를 들고 와서 줄을 서서 물을 받아가고, 나는 호스를 들고 물을 퍼주고 했지요. 물을 받고 고마워하던 사람들, 시장님이 감사패를 주었을 때의 느낌 이런 것들이 ‘보람 있는 삶’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40대 말에 통장 일을 맡아보면서 동네의 이런저런 일을 시작한 백 회장은 수협의 중매인이 된 오십대 초반에, 통영에서 처음으로 무료급식 봉사를 시작했다. 보건소에서 걷기 운동 캠페인을 시작할 때 걷기 지도사가 되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걷기 지도를 하고, 금연지도원이 되어 금연 홍보를 하기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런 일들은 대개 모양은 남을 돕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나 자신을 도울 때가 많다. 주민자치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가치 있는 일의 한 축을 감당하게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정량동 주민자치위원장을 하면서 그는 200년 전 통영 읍민의 마음을 이어 ‘김영 통제사 각암비’를 세웠다. 최초의 각암비가 백성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것이니, 훼손된 각암비를 복원하는 데 주민자치위원회가 나선 것이다.

<br>

“당시 류성한 동장님이 나서서 그 일을 추진하고, 저는 거들었을 뿐입니다.”

김영 통제사의 후손인 해풍김씨 대종회는 백 회장에게 감사패를 주었다. 주민들에게 주는 감사패를 대표해 받은 것이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려고 숨어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다시 차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 감사하지요. 지금도 어디 뭐 봉사를 하거나 후원을 하면 사람들이 ‘뭐 나올라고 해요?’ 하고 물어요. 정치에 뜻이 있나 하는 질문인데, 그런 뜻은 일체 없습니다.”

의도 없이 하는 수고는 늘 보람이라는 소득을 안겨준다. 봉사하는 보람을 알게 되어 날마다 행복한 날이다.

김영 통제사 각암비

2019년 주민의 힘으로 복원된 김영 통제사 각암비
2019년 주민의 힘으로 복원된 김영 통제사 각암비

순조 때인 1829년, 통영에 큰 화재가 나 300여 가구가 불탔다. 김영 통제사는 바닷가 덤바우에 올라 화재 진압을 지휘하고, 남망산의 소나무를 베어다가 전소된 백성의 집을 짓게 했다. 그러나 이는 국법인 금송령을 어긴 일, 김영 통제사는 이 일로 파직 당했다. 통영 백성들은 이를 안타까워하며 그가 서서 지휘했던 덤바우에 그 은덕을 새겨 각암비로 남겼다.

이 각암비는 1970년대 도로공사를 하면서 사라졌다. 2019년 정량동 동민들은 각암비복원 추진위원회(위원장 백현백)를 조직하고 모금활동으로 비석이 있는 작은 공원을 조성했다.

저작권자 © 통영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