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화
통영교육희망네트워크 의장

요즘 경남교육이 몇 년 전 갑작스런 무상급식중단 사태 때처럼 다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분야가 되고 있다.

<경남학생인권조례>재정과 관련해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지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교육에 관해, 혹은 학생이라는 존재에 관해 이렇게  모두들 앞 다투어 걱정해준 적이 없었던 듯해서 반가운 일이다.

학생으로 흔히 통칭되어지는 우리 아이들은 학생에게 과연 인권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복장과 두발검사부터 통과를 받으며 들어서는 교문, 들어서면 바로 휴대폰을 제출해야 하는 단절되고 지극히 제한적인 교실·교과를 선택한 일도 교사를 선택한 일도 없는 주어진 대로 받아야 하는 수업. 그  모든 과정을 다 마치고 나서야 교문을 나설 수 있다. 교문 밖을 나서지만 귀엽거나, 안쓰럽거나, 조그만 무리지어 다니기만 해도 무섭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불편하게도 특별한 존재들이다.

<불완전한 사람, 미성숙, 충동적, 통제 불가능, 무섭다… >흔하게 어린이나 학생들을 대하는 느낌을 표현하는 언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19세기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말도 안 된다 며 반대하던 사람들이 여성을 표현한 단어와 너무나 똑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인이 된 나는 때로 (실은 종종, 자주) 미성숙한 행동을 하며 충동적 일 때가 있고, 통제 불가능일 때를 심지어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주위에 스스로의 그런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후회하는 다른 성인들도 늘 보고 산다.

그러나 성인에게는 이런 과한 일반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특정집단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집단을 특정화하고 싶을 때 쓰는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누군가를 특정집단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그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열등하거나 우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차별의 시작이다.

경남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지면 동성애나 양성애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안다. 배운다고 동성애자가 될 수 있나? 선택할 수 있을까? 성정체성이 선천적이라는 것은 이미 여타의 과학적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게다가 동성애나 양성애가 나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이야기이므로 걱정이 아니라, 차별의 이야기다.

학교는 학생의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 소지를 금지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조항을 보고 ‘휴대폰을 맘대로 학교에서 쓸 수 있다니, 이건 좀 너무하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핸드폰만할 것이다’ 등 걱정이 많은 학부모들도 있다.

실제 가정에서 걱정스런 아이들의 휴대폰 사용을 제한할 수 있었냐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면 학교는 가능할까?

강제와 강압이 내용인 통제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고, 실제로 학교현장을 그런 곳으로 만드는 것을  부모들이 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이들은 과연 핸드폰을 통제할 능력이 없을까? 어느 아이들도 시험고사장에서 핸드폰을 내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는다.

시험에 방해가 되거나,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정한 행위와 연관 지어질 수 있다는 것에 모두 동의하기 때문이다.

성인들에게 휴대폰을 강제로 제출해서 내놓으라고 하는 곳은 고사장 말고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 성인들에게는 절제능력이 있고, 또한 중요한 전화가 얼마든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봉사활동을 했던 동아리장인 학생과 급히 연락을 해서 서류를 받아야 할 일이 있었다. 받지 못한다면 서류의 위치만이라도 알면 되지만 아이가 핸드폰을 돌려받을 때까지는 그냥 불통의 상황이었다.

학생의 잘못이 아닌데도 학생에게 뭔가 서류를 맡기는 것은 앞으로는 좀 힘들겠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어도 역할이나 역량을 제한받는 일, 전혀 무책임하지 않았지만 믿지 못하는 취급을 받아야 하는 일이 본인도 모르게 일어난 것이다.

KT 서대문 화재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휴대폰이 우리 일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그저 상상한 것보다 크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상상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핸드폰은 이미 너무 들어와 있다. 단순히 통신을 위한 편의기구나 심심풀이 오락 기구의 역할을 넘어섰다.

작년 포항지진 때 실제로 휴대폰을 학교에 제출하고 있던 아이들은 직접적으로 위험알림문자를 받지 못했고, 학교의 대응방식에 따라야만 했다. 올 3월  폭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을 통제당하면 ,위험한 순간도 다른 이의 판단에 맡기게 된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평등해야 안전하다. <가장 비싼 외교가 가장 싼 전쟁보다 낫다>는 말을  나는 이렇게 바꿔서 표현하고 싶다. <가장 비싼 부작용도 가장 싼 통제보다 낫다>.

교실이 무너지고 교권이 무너진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많다. 당장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있어도 공부한 적이 없었다. 우리도 학생이었지만, 그래서 다 잘 아는 것처럼 그들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소리가 늘 더 높고 컸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아이들이 많아서 교실이 너무 소란스럽고, 힘들어진다면, 더 잘 듣기 위해서 교실 당 학생 수를 OECD 평균수준으로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의 불필요한 업무를 줄여주고, 실제로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보장해줄 수 있게 교원의 수를 늘여나가는 등 교육예산을 또한 선진국수준으로 맞춰나가야 옳지 않을까?

그런 손써야 할 부분들은 놔두고 돈 안 쓰고 아이들을 키우려고 통제를 더 강화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모습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가 다함께  세금을 써가며 아이들을 교육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존엄함을 느끼고 배우고 공부해서 스스로도 , 또한 사회의 다른 모든 이들도 그렇게 대하여 줄 것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이들을 특정집단화해서 통제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학생에게도 엄연한 인권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적용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주변에는 돌보아야 할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더 많은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학생인권’은 그래서 인간의 범위가 넓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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