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식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정한식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해가 뜨기 전의 새벽 공기는 시원하다. 잠든 아내의 모습을 뒤로 하고 밀짚모자에 장화를 신고 팔토시를 하였다. 밀짚모자는 농사일에 필수품이다. 무게를 느끼지 않고, 둘레창이 넓어 햇볕을 잘 가려 준다. 그리고 바람이 적당히 들락거리니 더운 여름날씨에는 안성맞춤이다. 예초기에 윤활유를 주입하고 충전된 전지박스를 메고 나선다. 형제들과 지인들이 오기에 마당 예초를 우선한다. 여름날의 풀들은 참으로 부지런하다. 농부와 풀들은 숨바꼭질을 하듯 예초를 하고 돌아서면 또 예초를 하여야 할 정도이다. 돌 틈을 비집고 올라오는 이름 모르는 풀, 담장 사이까지 어김없이 풀들이 자란다. 이주일 정도 예초를 못하게 되면 풀들이 숲을 이룰 양으로 마당도 풀밭으로 변한다. 예초를 하고난 마당은 멋진 녹색 잔디밭으로 변모하고, 풀 냄새가 코끝에 닿는 서정 가득한 마당이 된다. 지난 2월에 메주, 소금, 맑은 물을 정성스럽게 장독에 담았다. 양지 바른 처마 밑에서 100일간 밤낮으로 숙성과정을 거쳤다. 형제들이 모여서 올해의 장을 떴다. 햇살이 좋고 바람도 잦아든 여름날이다. 장독 뚜껑을 여니 고향의 맛이 향기로 변하여 얼굴을 스친다. 맛 좋은 간장과 된장을 예고하여 주었다. 맑고 노란 빛깔 좋은 메주를 꺼내어 통에 담았다. 병에 깔대기를 꼽고 그 위에 고운 천을 놓고 간장을 걸렀다. 한 병씩 계속 담겨지는 풍경이 오늘의 우리집 그림이다. 간장 향이 느껴진다. 우리 가족들 그리고 멀리 있는 자식들도 오늘 담은 간장으로 반찬의 식감을 만들어 낼 것이니 같은 입맛이 되는 것이다. 2년 정도는 간장과 된장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성 싶다. 매실은 적은 양의 수확이지만 여름이 주는 선물로는 그런대로 좋았다. 보리수나무는 초록 잎의 무성함이 넉넉하다. 그곳에 빨간 보리수가 주렁주렁 열려 수확의 즐거움이 크다. 따고 또 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열렸다. 거름도 주지 않고 제대로 된 관리도 하지 못하였는데도 매년 보리수를 한가득 안겨 준다. 우리는 보리수 수확에 흠뻑 빠졌다. 잘 익은 보리수를 입에 넣으면 달달하면서 신맛이 혀를 자극한다. 지인이 준 헛개나무는 착근이 잘되어 파릇한 새순을 내밀었다. 뽕나무에 열린 오디는 아직은 굵기가 잘아 열매 따기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감자 수확기가 다가온다. 두둑에 조금씩 등을 내미는 감자들을 조금 담았다. 감자 캐기는 일주일 정도 더 지나서 할 예정이다. 가지 나무에는 벌써 조그마한 가지가 열렸다. 더욱 잘 자라라고 응원의 지주목에 묶어주었다. 오이도 많이 커서 지주목을 하나씩 더 세웠다. 열매 맺음을 하고 있는 무성한 오이나무 옆에는 특유의 기분 좋은 향이 가득하다. 고추도 제법 자라 고춧대를 세우고 아래 부분의 잎을 솎아 데쳐 간장에 버무리니 맛있는 반찬으로 변신하였다. 어린 첫 깻잎을 조금 따서 오늘 저녁 식탁에 올리기로 하고 머위와 상추도 쌈의 역할에 동참시켰다.

여름은 풍성한 잔치 밥상을 차려준다. 식물들이 경쟁하듯 자라고 채소가 주인을 기다리고 결실 맺은 열매들이 농부를 바쁘게 하고 있다. 자연은 여름을 통하여 우리에게 풍요를 선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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