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식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정한식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보내던 시절, 방학이면 농촌 고향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이른 아침 어머님의 깨움에 눈을 뜨게 되고 그때에는 이미 아버님은 뒷산 높은 곳으로 땔감 마련하러 가시고 어머님은 식사 준비 등으로 분주하였다. 어머님은 나에게 아버님이 일하고 계신 뒷산으로 가길 재촉하였고 나는 마지못하여 지게를 지고 뒷산으로 오르곤 하였다. 저 멀리 보이는 산에 땔감을 마련하기 위하여 허리 굽혀 일하는 아버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나는 지게의 무게를 느끼면서 산을 올랐다. 아버님 옆에 다다르면 잠자리에 있을 아들이 지게 지고 나타난 것에 놀라기도 하고 대견해 하기도 하였다. 아버님과 같이 낫으로 풀을 베기도 하고 괭이로 나무뿌리를 파기도 하는 작업으로 등에 땀이 흠뻑 날 때까지 그곳에서 일을 하였다. 아버님과 나는 각각 한가득 땔감을 지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동네 가운데 길을 통과하게 되어 동네 어른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른들은 지게에 땔감을 지고 땀을 훔치며 걸어가는 우리 부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를 대견한 아들로 불러 주었다. 마음속으로 멋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아침 밥상머리에서도 가족들의 칭찬이 많았다. 도시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방학이면 새벽에 아버지와 같이 산에 가서 일을 하는 일화가 우리 동네에는 자자하였고, 그로 인하여 나는 효자로 칭하여졌다.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한 아내가 농촌 일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특히 전기 불을 사용하고 연탄보일러 난방을 하는 집에서 평생을 지낸 전형적인 도시 아가씨였다. 군불로써 난방을 하고 땔감 나무로 밥을 짓는 우리의 고향집 모습은 생소하고 어색하였을 것이다. 신혼 초에 휴가 때면 농촌의 부모님 댁에서 지내기도 하였고,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는 고향 부모님 집에 많이 머물게 되어 우리 부부는 고향에 자주 갔다. 고향 농촌에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어하는 아내를 나는 흔들어 깨웠다. 부엌에 나가기를 재촉하였고, 아내는 이른 새벽 부엌에 나가서 아궁이에 불을 때어 가족들의 아침밥을 짓기도 하였다. 아내는 싫은 내색 없이 농촌 생활에 잘 적응하여 주었다. 어머님은 우물가의 일에도 아내를 동원하였고, 밭일에도 아내와 같이 다녔다. 그리고 어머님은 동네사람들이나 일가친척들에게 틈만 나면 며느리 자랑을 많이 하였다. 농촌일도 겁내지 않고 시부모님 집에 오는 일을 좋아한다는 등의 어머님의 말씀이 소문이 났다. 아내는 어느새 효부가 되어 있었다. 어머님이 별세하기 전 10여년을 우리와 같이 지냈다. 그때에도 어머님은 찾아오는 일가친척들에게 며느리의 효성 자랑을 늘 하였고, 아내는 그러한 어머님에게 늘 미안해하였다.

어머님이 저승에 가신 지도 29년이 지났다. 어머님은 자식을 효자로, 며느리를 효부로 만들어 주셨다. 아직도 부족함이 많은 아들을 효성 지극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사람은 어머님이다. 어머님에게 미안하고 죄송하였던 그 시절들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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