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중앙대학교 4.19혁명기념사업회장, 남해항일운동사 주집필위원

김정일 중앙대학교 4.19혁명기념사업회장
남해항일운동사 주집필위원

올해도 어김없이 제102주년 3·1절이 지나갔다.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함성이 여전히 귓전에 맴도는 듯하다.

3·1운동의 역사적 진실은 미화시켜서도 왜곡되어서도 안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왜곡된 역사는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이 글은 경남 남해에서 있었던 3·1운동 관련된 이야기다.

36년 전 1985년 남해에는 3·1운동 발상 기념비를 세워졌다. 비문의 원안은 문신수가 만들었다. 그런데 이 비문 원안에 대해 애국자 정익주 아들 정행규(전 삼동면장 남해향교 전교)가 이의를 제기하여 고발하였다. 무슨 일인가? 이야기는 3·1운동 당시 진실을 요구한다.

이예모는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1919년 3월 21일(음력 2월 20일)천도교 진주교구로 전달받고, 4월 2일(음력 3월 2일) 설천면 문항리 만세운동은 참가하였으나, 본격적인 만세운동인 4월 4일 남해읍 만세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비문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또 당시 재판소 판결문에 있는 만세운동의 핵심인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강한문, 김희조, 박경수, 유봉승, 유찬수, 윤주순, 이예모, 정몽호, 정순조, 정용교, 정익주, 정임춘, 정재모, 정학순, 정흥조, 하상근, 하준호 17명이다. 그런데 비문에는 6명이 추가되어 있다. 이 6명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비문에 오른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당시 진주법원에서 문신수가 쓴 비문에 문제가 없고, 하자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 뒤 남해문화원에서 2006년 이예모를, 2010년에는 문신수를 각각 ‘내 고장 역사인물’로 선정되어 문화원 앞에 현판까지 세워 기렸다.

문제는 고소인 정행규이다. 바른 주장을 하였으나 역사의 무지한 판결에 의하여 재판에 패한 후, 억울함에 대인 기피증까지 더해 폐인이 되었다. 결국 가슴앓이를 하다가 병증이 깊어져 고인이 되었다.

이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문신수 필화사건이 잊혀질 무렵, 일간 경남일보 2016년 4월 29일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의 그 뒤안길(229) <정직한 교수 수필가 문신수(5)> 편에 문신수 필화사건의 중심인물인 이예모의 이야기가 기사화된다. 이예모의 손자 이처기 시인이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강 교수는 제대로 검증도 하지 않고,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함으로써 제2의 문신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서재심 시인(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도 남해문학(2017년 제18호)지에 출처도 밝히지 않고, 이 시인이 제공한 자료를 그대로 썼다. 이예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예모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란 제목을 사용했다. 이에 대해 증오심을 갖도록 만세운동 시위를 고현면 면장 김치관이 여수경찰서에 밀고자로 설정하였다. 천인공로(天人共怒)한 자로 낙인(烙印)시켰다.

또한, 그 위기 속에서 3·1만세운동 선두(先頭)에서 이예모의 무용담을 적었다. 그러면서 “만약 이예모 선생이 없었다면 전국에서 독립만세를 펼쳤는데, 우리 남해만 그 때 그런 운동의 역사가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후손으로 아쉬운 마음이 컸을 것이다. 지역이나 나라마다 의인의 용기와 실천이 역사를 만들고, 그런 역사로 인해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정신적인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남해사람으로서 3·1운동 앞장선 애국지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글도 덧붙였다.

지난 100년간 3.1절 행사장 입구에 전시해 왔던 잘못된 역사

위와 같은 기록에 무게감을 주어 입증하도록, 더 나아가 당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그 원본사진 사진을 매년 3·1절 행사장 입구에 전시해 왔다. 당시 독립선언서 사진 하단 원문은 그대로 옮겨 본다.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 사는 이예모(李禮模)가 하동에서 이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1919년 4월 3일 설천면 남양리 노상에서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면서 고현면 포상리를 거쳐 남해읍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판결문과 정몽호 육필원고를 보면, 이예모는 문의리가 아닌 남양리에 살았고, 4월 3일의 기록은 어떤 역사적 자료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이예모와 유찬숙에 대해 ‘4월 2일 밤,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 노상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여 조선독립시위 운동을 위해서 치안을 방해한 자들’ 이라는 판결을 했다. 특히 독립선언서는 낭독하였다는 대한독립선언서는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아니고, 하동 박치화 외 12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이다. 당시 재판소 판결문이나 육필원고에서는 4월 2일 밤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와, 이예모가 4월 4일 남해읍 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근거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2년 전 3.1운동 100주년이 돠는 해 2019년 진양정씨 대표로 정임춘 증손자 정영철. 김경은 부부는 정행규와는 달리 당시 진주예심종결결정서(1919.7.15.) 와 대구복심판결문(1919.9.23.)판결 전문과 각종 자료를 제시하여 남해군에서 인정받아 남해 3·1운동사를 새롭게 기록하는 원년의 해가 되도록 하었다. 정영철은 36년 전 정행규가 밝히고자 한,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밝혔다.

그해 남해문화원에서는 이예모와 문신수 현판을 자진 철거하였다. 서 시인도 이처기 시인이 준 자료를 그대로 적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올해 2021년 2월, 1919년 남해 3·1운동의 주축이었던 정몽호의 당시 상황과 옥고 담이 언론에 공개됨으로서 위 사실을 더욱 확증하였다.

강희근 교수는 뒤늦게 2021년 3월 5일자 경남일보에 정중한 사과의 글을 올렸다. 철거와 사과는 끝이 아니다. 되새겨 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 사건으로 애국자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오랫동안 나랏일을 충실이 하였고, 퇴직 후에도 남해향교 전교로써 제 몫을 해냈던 한 인물이 불명예를 안고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가짜 애국자’ 라는 질타는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역사를 알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 역사는 왕왕 왜곡되어 엉뚱한 이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며 기리고, 진정 기억해야 할 인물은 오명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다. 기미년 남해 3·1독립만세운동 지도자 17명 추모 기념비에 잘못 새겨진 어두운 그림자, 오류도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한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우리들의 몫이다.

김정일 중앙대학교 4.19혁명기념사업회 회장 / 남해항일운동사 주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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