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식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정한식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지난 5년간 같이 살던 며느리와 손자 둘이 서울로 이사를 갔다. 처음엔 한 아파트 공간에서 다섯 식구가 지낸다는 것이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하였지만 시부모와 며느리의 인연을 공고히 하여 진정한 가족이 되는 과정과 손자들과의 혈육의 정을 공유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둘만 살던 집이 갑자기 다섯 식구가 살게 되니 분주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처음 합류할 때에는 아내와 나도 정년퇴직 전의 직장인이었기에 아침이면 손자들의 유치원과 어린이집 보내는 일 그리고 며느리와 우리 부부도 출근을 하여야 했다. 나의 연구실에 어린이 공간을 하나 만들었다. 바닥에 작은 매트를 깔고 아이가 그곳에서 뒹굴 수 있도록 하여 급할 때에는 나의 출근길에 손자를 동행하였다. 직장 동료들도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서서히 통영 생활에 적응하여 갔다. 둘째 손자가 겨우 걸음을 하면서 아파트 내의 어린이집에 등록을 하였지만 우리와 헤어짐을 강력 거부하는 바람에 며느리가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나는 사탕으로 현혹시키기도 하고 잠시만 있으면 곧 오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어린이집 선생님께 인계하고 돌아섰다. 어린이집에서 들려오는 손자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맴돌지만 아는 체를 하지 않고 출근을 서둘렀다. 아이들이 커가는 것은 참으로 순간인 것 같다. 후다닥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미 예정된 이사 일정이었지만 통영에서의 생활을 쉽게 떨칠 수 없어 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 손자는 절친이 생겨 매일 만나고 같이 운동하러 다녔다. 학교 가는 일과 학원가는 일들을 재미로 느끼는 행복한 순간들이 흘렀다. 둘째 손자도 글을 배우고 일기를 매일 쓰게 되어 저녁이면 나에게 일기를 읽어 주었다. 나는 손자의 일기 읽는 낭랑한 목소리를 듣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힐링을 하였다. 손자는 서울 가는 날의 이사 시간을 밤 11시 59분에 출발하자고 할머니에게 제안하고 자기 엄마에게 보챈다. 한 순간이라도 통영에 더 머물고 싶어 하였다. 나는 ‘말이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부터 시작하여 서울의 좋은 점을 손자에게 열심히 일러 주었으나, 계속 갸우뚱하였다. 매일 아빠, 엄마 그리고 너희들이 한집에 모여 사는 행복함에 대하여도 설명하고 설득하였다.

고향 선산에 성묘하고 조상들에게 아들 가족들의 이사를 아뢰었다. 그리고 부산하게 이삿짐을 챙겼다. 아들 부부는 앞집, 위집 그리고 아랫집에 이사 인사를 하러 다녔다. 이웃들이 전하는 이별의 아쉬운 인사 때문에 며느리 눈에는 계속 눈물이 고였다. 아내는 조그마한 케익을 준비하여 촛불을 켜고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서울로 이사를 하는 데 대하여 덕담을 하였다. 그간 수고한 아들 가족들을 위로하고 손자들은 케익의 불을 껐다. 아들 부부와 손자 둘은 우리 앞에 큰절을 하였다. 서로 돌아가며 깊은 포옹을 하였다. 며느리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결국 울음이 터졌다. 시어머님을 붙들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 아내도 울음을 참지 못하였다.

5년간의 통영생활을 마무리하고 아들 가족은 서울로 떠났다. 아내는 멀어져가는 승용차를 달음질쳐 따랐다. 그리고 우리는 휑한 아파트 대문을 간신히 열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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