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윤 통영3.1동지회 회장

100여 년 전 통영을 뜨겁고도 처절하게 달궜던 만세소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 만세운동에 참여해 고초를 겪었던 독립유공자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통영3.1동지회’다. 처음에는 60여 명이 함께했지만 이제는 모두 고향을 떠나 20명이 채 안 남았다.

통영3.1동지회 회장은 고채주 열사의 후손인 고석윤 씨다.

고채주 열사는 통영 4차 만세운동의 주동자다. 1861년에 태어나셨으니, 당시로서는 59세의 고령이었다.

고채주 열사는 4월 2일 부도정시장(현 중앙시장)에서 수천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됐다. 그 뒤 1년간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출소했다.

하지만 당시의 병보석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출소 당시 장조카였던 고석윤 회장의 할아버지가 대신 수감되어야 했다.

“고채주 열사는 증조할아버지의 막냇동생입니다. 그때 대신 옥고를 치르신 제 할아버님의 연세도 45세였어요. 온 집안이 고초를 나눠 짊어진 거지요. 고채주 할아버님은 고문후유증이 심해 출소하고 얼마 안 있다 돌아가셨습니다.”

고채주 열사는 통영 만세운동 주동자 중에서도 특별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이 시작되기 전부터 해외에서 민족운동을 해왔으며, 만세운동 이전부터 조직화된 독립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고채주 열사의 생가터 앞에서

“고채주 할아버님은 호주선교사를 통해 일찍부터 세계에 대한 눈을 떴던 분입니다. 41살이던 1901년 미국으로 건너가 ‘자강회’를 설립하신 분이니까요.”

자강회는 교포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단체다. 1907년에는 난립해 있던 23개의 교포단체를 통합해 ‘하와이한인협성협회’를 결성하고 ‘합성신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후 하와이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가 통합된 ‘국민회’를 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09년 국민회의 밀명(密命)을 띠고 귀국했다.

“미주의 국민회와 상하이 임시정부 사이의 연락책으로 군자금 조달 등의 역할을 맡아 귀국한 겁니다. 통영에 돌아와서는 통영향교 장의로 활동하며 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지요.”

지금으로 치면 통영에 하나뿐인 고등교육학교의 교장선생님인 셈이다. 통영 최초의 만세운동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데는 고채주 열사의 역할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도 가능하게 한다. 고채주 열사가 소장한 진평헌의 격문 ‘동포에 격하노라’에는 여기저기 자필 수정한 흔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진평헌 등 학생들의 궐기가 발각돼 주동자들이 체포되자, 고채주 열사는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가장 격렬했던 4월 2일의 시위에서 앞장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됐다.

당시 일경은 소방대를 출동시켜 군중에게 물을 퍼부으면서 만세를 제지했는데, 고채주 열사는 가슴으로 물을 받으며 더 힘차게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연로한 나이였지만, 열정은 소년학생 못지않았다.

고채주 열사의 직계 손녀인 고은애 여사는 대구대학교 설립자로, 작년에 90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그 외 다른 직계손들이 있지만 모두 미국이나 다른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어, 고석윤 회장이 후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통영에는 저만 남아 있으니까요. 나는 종손이라 통영을 지키고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종손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 고석윤 회장은 통영 입항조 할아버지로부터 11대 종손이다. 5대 할아버지 고시익 선생의 항렬에 백운 고시완 선생이 있다.

6대 할아버지인 고영진 진사의 과거시험 답안지(전국에서 16명을 뽑는 과거시험에서 2등을 했다.)

고석윤 회장의 안방에는 6대 할아버지인 고영진 진사의 과거시험 답안지가 걸려 있다. 거실에는 7대 고재신 진사의 과거시험 답안지, 작은 방에는 그 동생 고재경 진사의 답안지가 있다.

“6대 진사할아버님은 조선 후기에 처음 치른 과거에서 2등으로 급제하셨습니다. 전국에서 16명 뽑는데 통영의 도련님이 급제를 하신 것이지요. 두 아드님이 모두 과거에 급제를 하신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헤아려 보면 헌종, 철종 때 과거시험 답안지들이다.

진사 할아버지들의 바로 아랫대인 8대 할아버지 고병주 선생이 고채주 열사의 큰형이다. 그리고 9대 고광훈 선생이 고채주 열사를 대신해 나머지 옥고를 겪은 조부시다.

10대인 아버지 고두곤 선생은 1906년생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대인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을 몸으로 겪어냈다. 동생과 친척들은 형편에 따라 타지방으로 떠나 살기도 하지만 종손이라는 책임감은 통영을 떠날 수 없게 했다.

11대 고석윤 회장도 마찬가지다. 10대의 제사를 모두 모시며, 통영 역사의 증언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집안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통영의 역사입니다. 고채주 열사님의 경우도 통영의 항일 항쟁사로 계속 그 정신을 계승해 나가야 하거든요. 이런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독립을 쟁취해 잘살고 있는 겁니다. 그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는 역사를 계속 말하고 지켜야지요.”

임진왜란 직후 통영에 들어오게 된 입항조부터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오고 있는 통영3.1동지회 고석윤 회장은 장흥고씨의 종손이기 전에 통영 역사의 종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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