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영 남문을 살려라②

세병관-남문-병선마당을 잇는 축이 통영의 정체성이다.(사진 출처 :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통영지도 청남루)

통영은 조선이 세운 군사계획도시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6년, 조선은 초토화된 나라를 수습하기에 급급했던 그 때 통제영을 지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는 돌아갈 궁궐이 없어 월산대군의 옛집에 살면서 겨우 담장만 쌓고 정무를 보았다. 궁궐에 있어야 할 관청도 인근 민가에 두었다.

이렇게 가난하고 힘이 없던 조선이, 궁궐도 짓기 전에 지은 곳이 바로 통제영이다. 통제영의 주 객사인 세병관의 현판은 임금의 위엄을 나타내는 크기로 지어졌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3도 수군을 통솔하는 해군 본부였다.

이후 통제영은 차례로 운주당, 백화당, 경무당, 내아, 병고, 12공방, 중영, 중영내아, 망일루 등 100여 동의 관아건물을 지어가며 장중한 요새로 자리잡았다.

통영성은 숙종 때인 1678년에 완공됐다. 정문인 남문을 비롯해 동문, 서문, 북문의 4대문과 문루가 없는 작은 2암문이 있었다.

남문은 통제영의 정문으로서, 각종 대소사의 출입문이 됐다. 통제사가 임명돼 올 때도 남문으로 들어가야 했으며, 수군 훈련인 수조를 할 때도 남문으로만 다닐 수 있었다.

통제영 남문을 나서면 바로 병선마당과 연결됐다. 조선의 병선마당은 지금의 강구안보다 훨씬 더 넓었다. 일제가 매립을 하기 전이니, 중앙시장 일부와 항남동 일대가 통제영 앞의 바다였다.

병선마당에는 통제영의 8전선이 위엄 있게 서 있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은 4전선을 거느렸고, 그 외 다른 수영에는 2전선이 있었으니, 통제영의 8전선은 조선수군 최고 사령관의 위엄을 상징했다.

통제사는 조선의 왕을 대리해서 수군을 통솔하는 최고 사령관이었다. 통제사가 한 달에 두 번 서울을 향해 ‘망궐례’를 행한 이유도 통제사가 왕의 대리자였기 때문이다.

통영 정체성은 군사 점호와 조직 관리에서 드러난다.

군사도시로서 통영은 ‘세병관과 남문, 병선마당’을 잇는 축이 살아나야 통영의 정체성이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통영의 구도심을 살리는 여러 가지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업의 중심에는 반드시 남문이 있어야 한다.

통영시가 최근 ‘통제영거리 조성사업’에서 남문 복원을 미루고 ‘디지털 복원’으로 방향을 튼 데는 보상 지연으로 인한 사업비 반납이 큰 몫을 했다.

2009년 통제영거리 기본계획 용역을 마친 다음 실제 남문 복원지 주변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이루어진 2014년 사이에는 5년이라는 간극이 있다. 보상 문제가 난항을 겪으며 미루어진 기간이다.

문화예술과 담당자는 “제때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42억이 삭감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3년 이상 사업이 집행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반납분이 생겼다는 것이다.

보상 기회가 생기면 더 많은 보상을 받으려고 버티는 시민의식도 아쉽다. 그러나 사업비가 줄어들면 ‘더 가치 있는 것’을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하고자 하는 집행부의 역사의식도 아쉬운 대목이다. 홍보관이나 전시판매장, 병영체험관을 못하더라도 통영 정체성의 핵심인 남문을 꼭 복원해야 한다는 의지가 있어야만 했다.

통영 남대문(사진 출처 : 1913년 선남발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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